그래서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웃는 얼굴이며 교회에서 마주치는 분과는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허그하고 안부를 물으며 교회 제반 일에 발벗고 나서서 봉사하며 교인들의 대소사에 함께 울고 웃으며 다정다감하며 예배시간에 온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집중하며 그들의 직장에서 솔선수범하며 그들의 가정은 천국처럼 날마다 웃음꽃이 피는가?
아니면, 그렇게 살고 싶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삐뚤빼뚤 혹은 앞뒤로 갈깃자 걸음을 걸으면서 후회와 소망 사이를 번복하며 살고 있는가?
나로 말한다면.
교회에서 언제나 웃는 얼굴이지 못하고(지은 죄가 많아서인지 교회에 가면 눈물이 먼저 난다) 교회에서 마주치는 분과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안부를 드리며 교회 일에 발벗고 나서는 봉사는 예전에 끔찍하도록 열심이었고, 교인들의 대소사에는 거의 의무감으로 악착같이 쫓아다녔으며 예배시간에는 하나님께 완전 집중하기 위하여 일년에 두어번 정도 찾아오는 잠마귀(!)를 쫓느라 뒷덜미에 쌔~한 느낌의 허브오일을 한방울씩 떨어뜨려 주었으며 사람을 만나는 곳에서는 술담배와 더불어 주님을 찬양했으며 가정에서는 새벽마다 새로운 결단과 저녁즈음에서의 어쩔 수 없는 자폭과 잠자리에서의 중언부언하는 회개와 순간순간 복받치는 눈물의 기도로 가정의 천국化를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니까...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나름 노력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고 그래서 구원이라는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지나간 시간들을, 이미 지은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와 앞으로 지을 죄를 기요틴으로 쳐내듯 처단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해가 되면 한국의 목사님들이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늘 인용하는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는 그 구절은,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하도 마무리를 못하므로 일년치 죄뭉텅이를 뭉뚱그려 매듭을 지어주고 죽을 때까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될 죄책감을 하나님의 은혜로 자동변환시키기 위한 위로용 구절이다. 하늘아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는 성경구절은 괜히 있는 게 아니잖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세상은 눈꼽만큼도 달라지지 않는다.
구원받았다고 은행의 얄팍한 잔고가 뻥튀기로 불어나는 것은 아니며, 주색잡기에 골몰하던 불신자 남편이 갑자기 회개하여 교회열성분자인 아내의 발을 씻어주는 것도 아니며, 자식들의 전교석차가 한 자리 수로 펄쩍 뛰어오르는 것도 아니며, 백화점에서만 가면 늘 오시던 지름신이 어느 순간 강림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증거가 뭐냐 하고 대들 사람을 위해 한 마디 한다면...
<어디로 가는 것이 맞는 길인 줄은 안다는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순간 눈이 멀어 예수님이 가라고 하신 좁은 길은 외면하고 넓디넓은 죄악의 길바닥에 서있게 된다 하여도 아이고 이 길은 아닌데, 하면서 머리를 긁적거릴 양심(믿음이라고 하면 더 고상하겠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성령이 얼룩만땅인 마음속에 낑겨앉아계시면서 코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열심이든 그렇지 않든 일요일이면 꼬박꼬박 일수찍듯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에 한해서 하는 말이지만)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근히는 변한다. 옆엣 사람들은 몰라봐도 하나님은 알 수 있을만큼 아주 천천히.
앞으로 두발짝 나갔다가 뒤로 세발짝 물러서고, 어느 땐 문워크로 완전 뒷걸음질치기도 하면서도 하나님이 계신 쪽을 <푯대>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앞으로 간다. 그 진도는 너무 느려서 가시거리 25킬로 이상 보이는 선명한 시력을 가진 자만이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 달 주기로 확인한다면, 혹은 일년 주기로 확인한다면 도낀개낀처럼 보일지 몰라도 한 오년 텀을 두고 관찰한다면 영점 이밀리나 일센티 정도 신앙이 자란 것을 자타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느려터짐>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다.
삼년 전에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교회에 새로운 목회자가 부임해왔다.
장장 28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하신 전임 목회자의 후임이었다.
(카다피나 후세인이나 박통도 아닌데 한 교회에서 삼십년 가까운 세월을 집권(너무너무 죄송하다)한다는 것이
참 이상하긴 했지만 그 전 전임 목회자 역시 삼십 년 가까운 세월동안 굳세게 한 교회를 지켜내셨으니 일단 감사는 드려야할 것 같다. 당시는 이승만 시절부터 박통 시절까지여서 안팎으로 장기집권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까짓 삼십 년 쯤은...하면서 대다수의 교인들은 마치 한반도 윗쪽에서 어떤 분을 모시는 수준 비슷하게 거의 우상숭배 수준으로 모셨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 온 젊은(나와 동갑이다) 목회자는 부임 첫 해, 온 교회를 끓는 솥처럼 뜨거운 도가니로 만들어버렸다.
큰 행사 벌이지 않고, 그러므로 큰 분란없이, 장기집권에 비해서는 그다지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온유한 성품의 전 목회자와는 달리 젊은만큼 씽씽하고 과격한 목소리로 마이크 데시벨을 공해수준까지 쩌렁쩌렁 울리면서 수십년 동안 (겉으로 보기에는)뜨뜨미지근하게 신앙생활했던 교인들에게 끝없는 질문(엄밀하게 말한다면 질타)을 던지기 시작했다. 구원은 받았씀껴? 구원 받았쓰믄 대체 왜 이리 밍숭거린다요! 전 목사님은 뭘 가르쳤습? 몇 년 동안 전도한 숫자가 게우 요것이요?
그렇게 해서 부임 후 단 일년 동안, 전 목회자가 십년에 했던 각종 기도회와 행사의 숫자를 훨씬 웃도는 이벤트를 정열적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워낙 휘몰아쳤으므로 교인들은 정신차릴 겨를없이, 오래동안 얌전히 신앙생활 한 것을 모두 반성하고 패기만만한 목회자의 인도하심을 따라 착한 마음으로 순종했음은 물론이다.
온 교인들은 신앙 경력에 상관없이 예수님은 왜 세상에 오셨는가부터 시작해서 마치 한글을 처음 깨우치는 심정으로 죄와 용서와 십자가와 은혜와 부활과 성령의 내주하심과 전도에 대하여 재교육을 받았고, 그 시간은 분명 은혜로웠다.
그런데.
부임 이듬해도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수순으로 똑같은 이벤트로 똑같은 내용을 재재복습해야했다.
그러니까니 구원이란, 속죄함이란, 회개란, 은혜란, 전도란...이런 것이란 말이닷. 이런 투였다.
맨날 갈켜줘도 모르니 참 속터져 죽겠다, 그런 뉘앙스도 있었다. 우리는 삼년 꿇은 고시생처럼 열씨미 밑줄치고 회개하고 공부했다.
삼년 째 되던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올해 사년째로 접어들었다.
부활절을 기리기 위한 40일간의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재재재재복습했다.
사람은 왜 죄를 짓는가,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왜 이땅에 오셨는가...그러니 전도해야지잇!
어제 주일 아침, 교인들과의 친교가 나만큼도 없는, 거의 대인기피증 수준인 후배교인 한 사람을 만났다. 지금도 같은 동네에 살고 이전에는 몇 년동안 성가대와 지역공부를 같이 했던 터라 안면은 트고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텅빈 그녀의 앞자리에 앉을 자격은 있었다. 앞뒤 옆 보지 않고 책에 코를 박고 있던 후배교인이 반색을 했다.
-오랜만. 요즘 모하심까?
그러구러 나눈 근황. 참고로 말한다면 나는 교회 짬밥 40년차이고 후배는 20년차이다.
목회자의 눈으로 본다면 <느려터진 중에서 가장 느려터진>교인으로 평가될 후배였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고 단언컨대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그러할 뿐이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새로 목회자가 오기 전까지는.
신실하고 조용하고 성격상 남과 잘 어울리지 않는 그녀는, 예전에는 집에서 찬송가도 곧잘 부르고, 기분나면 새벽기도도 가고, 동영상설교듣기도 취미였는데 요즘은 <나가수>노래만 계속 리핏해서 듣는다는 그녀의 근황은 쫌 슬펐다. 아니, 많이 슬펐다.
-아멘이네
요즘도 피아노치면서 가스펠 부르는 취미를 버리지 않는 나였지만 나가수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임재범이 빈잔 부를 때 완전 그분이 오시더라니깐
후배가 은근히 물었다
-요즘 설교 어떻게 들으시남요?
-뭐... 그렇지...
-전요, 맨날 졸아요. 그게...오래됐네... 올해 들어선가? 아니 작년부턴가...?
그렇게 해서 (거의 대인기피증 수준인)교인 한 사람과, (미약한 대인기피증 수준인)나와 같이 나눈 분석.
-맨날맨날 똑같아요. 우리는 죄를 지었고, 구원을 받아야하고, 구원받았고, 구원받았으니 전도하자... 요즘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요? 대체 언제까지 복습, 재복습, 재재복습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땐 목사님께 묻고 싶어요. 그래서요?
나는 그 후배가 나를 믿고 하는 소리인줄은 알겠다. 한번도 입을 맞춘 적이 없었는데, 신앙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더더구나 없었는데 공감대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 이외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나? 아니 쫌 있나? 아니 많이 있나...?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니 다른 교인까지 갖다붙일 필요는 없겠지만 목회자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누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정말 모르고 계실까? 목회자 주위에 포진해있는 빠릿빠릿한 충성교인들에게 둘러싸여 간과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우리 목회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는 미명하에, 피켓들고 혹은 미스코리아처럼 어깨부터 사선으로 띠를 매고 지하철 입구나 아파트 단지나 시장골목으로 출동하는 전도대를 만들고 또 만들고 하는 동안에, 대인기피증 수준인 느려터져보이는 교인 하나는 몇년 전부터 교회 직분을 하나 하나 눈에 띄지 않게 슬쩍슬쩍 끊었고, 작금의 어느 순간에는 교회마저 끊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고, 미약한 대인기피증 수준인 느려터져보이는 교인 하나는 새해들어 그러니까 오개월 동안 단 한 번 교회에 출첵한 남편권사와 그 남편을 에스코트하기 위하여 역시 단 하루 겨우 출첵한 모태신앙 아들 때문에 차라리 동네 성당이나 온가족 같이 가는 것을 하나님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하면서 반 발짝 쯤 교회에서 발을 떼고 있다는 사실을 아실랑가 몰라.
겨우 커피 한 모금 들이킬 정도의 교제였으므로 다행이었다. 더 길어졌더라면 두 사람이 머리 맞대고 앉아 목사님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편지를 올릴 뻔 했다. 그 안에 꼭 들어가야한다고 입을 모은 문장 하나는. 그래서요?
저녁, 임재범의 <여러분>을 보고 들으면서, 같은 시각에 똑같이 화면앞에 있을 느려터져보이는 후배교인을 떠올렸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하나님.
내가 알고 있는,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는 그녀의 (느려터진)믿음은 적어도 그 수준인 것을 나는 확실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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