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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간의 기원

나는 얼마든지 손을 용서해주고 있다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6. 1. 5.

마음이 아픈 시간들로 가득차 있던 며칠.

아침마다 용서와 사랑을, 자비와 은혜를 간구했다. 기도는 어려웠다.

내가 바라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했고 터무니없는 것을 바라는 내가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했다.

기도하며 사랑할 사람들이라는 글자 밑으로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명단이 내 책상 앞에 붙어 있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기도했다. 기도하면서도 생각했다.

참 이상한 새해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은 네 가지로 압축해 놓았는데 그 중 앞의 세 가지는 변함없이 지킬 수 있어서 감사했다.

기도

메시지 성경 읽기

시집 필사

하지만 마지막 네 번째 일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일과였다. 카페에서 글쓰기.

내가 찜해 놓은 아름답고 고요하며 멋지고 럭셔리한 카페 두 곳이 바로 집 앞에 있는데

한 곳은 12월 23일 문인 친구들과 송년회 한 후 가보지도 못했고

다른 한 곳은 12월 30일에 들렀지만 글을 쓰러 간 것이 아니라 막장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사는 두 인간을 앉혀 놓고 설교하러 갔다.

우울한 기록이다, 이것은.

 

새해부터 난생 처음 가는 곳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새해부터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새해부터 그 알량한 지갑을 열 일은 또 왜 그렇게도 많은지.

 

그래도 감사한 일은 평안한 하루의 끝이었다.

저녁이 되면 모든 쓰레기같은 일들은 일단락되고(마음으로나마)

따스한 실내에서 따뜻한 저녁을 먹었다.

책을 읽고 정다운 통화를 하고 드립 커피를 마셨다.

이제껏 보지 않았던 드라마를 보며 눈물이 나도록 웃기도 했다.

요즘은 복고풍이 유행인가 보다.

매일 매일 시작과 끝이 좋았으니 그럼 좋은 하루였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조금 전 문예지를 뒤지다가 우연히 한 편의 시를 읽게 되었다.

첫 대목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손은 슬픈 일기를 쓰고 나는 눈물을 닦는다 일기를 쓰는 동안 나는 얼마든지 손을 용서해주고 있다

 

최문자 시인의 <손의 幻>의 첫대목이다.

마지막 대목도 단 한 줄로 되어있다.

 

나는 얼마든지 손을 용서해주고 있다

 

불현듯 이 아침 나도

시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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