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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신앙칼럼

대한민국에서 교인으로 살아가기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4.

대한민국에서 교인으로 살아가기

 

지난 명절이었다.

남편과 아들, 이렇게 세 식구가 성가대에서 선물로 준 예쁜 담요를 펼치고 둘러앉았다. 간만에 마련한, 오락과 친목을 겸비한 결전의 시간이었다. 광도 팔 수 없는 오리지널 선수들이 앉아서 - 설마 그것이 열 시간을 내리 할 줄은 모르고 - 팔뚝에 알이 배기도록 힘차게 내리쳤다. 각자의 성격대로 순간순간 시험에 들었다가 목소리 높이고 핏대를 세워 싸움 직전까지 갔다가를 반복하면서 집중적으로 동양화를 공부했다. 그런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맹하기 짝이 없는 내가 왕창 따버렸다. 뒤집기만 하면 딱딱 짝이 맞춰지고 쓸어오면서 꼭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한마디, 아이고 감사해야. 당최 첫 끝발이 식을 줄 모르는 네게 아들이 물었다. 엄마, 지금 누구에게 감사하다고 하는 거야?

음...글세...참으로 시기에 적절하기 않은 말을 한 나는, 더 이상 뭐라고 말을 못했다.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사는 사람은 남편도 마찬가지여서 숯불구이 집이나 꼼장어 집에 앉아서도(옆 테이블에 앉은 신부님이 열심히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남편은 그때 무척 은혜로웠다고 회상한다)빠뜨리지 않고 주님을 외쳐댄다.

그런 이상스런 방법이 어떻게 먹혀들어갔는지 모르지만 몇 사람 전도도 했다.

 

교회에도 다양한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어느 누구나 오라고. 그래서 교회는 ‘어느 누구나’ 온다. 당연히 별별 사람이 다 있다.

겉모습부터 경건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통이 유별난 사람도 있고 나처럼 경박스러운 사람도 있다. 청와대를 갔다 오신 분도 계시지만 감옥을 갔다 온 분도 계시다. 세계 곳곳을 여행한 분도 계시지만 비행기 한 번 못 타본 분도 계시다. 천문학적 숫자의 연봉을 벌어들이는 분도 계시지만 길거리 행상으로 연명하시는 분도 계시다. 목소리 큰 분도 계시지만 속엣말만 평생 하면서 일생을 사시는 분도 계시다. 믿음의 족보가 짱짱한 분도 계시지만 나 홀로 교인도 계시다.

주여 삼창을 즐겨 외치는 사람도 있지만 주여 삼창 소리만 들어도 닭살이 돋아서 쭈빗거리면서 주위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고, 통성기도를 하라면 입 꾹 다물고 눈 꾹 감고 남의 통성기도를 분석하면서 나름대로 은혜 받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힘차게 박쑤~ 하면서 찬양 드리는 사람도 있지만 눈감고 찬양을 묵상하면서 기쁨을 얻는 사람도 있다. 주방에서 설거지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톱의 매니큐어 색이 얼마나 이쁜가를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월례회 때마다 빵 만들어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이 만들어 온 빵 집 식구 먹이려고 가방에 넣는 사람도 있다.

일주일에 일곱 번 교회 오시는 분도 계시지만 주일 성수하기에 급급하신 분도 계시다. 맨날 늦게 와서 목사님 말씀 시작과 동시에 주보만 탐구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미리와서 성경 찾고 찬송가 찾아서 갈피에 끈 표시 해놓고 집에서부터 준비해 온 헌금 봉투 점검하는 분도 계시다.

오오 아름다워라 다양한 성도들이여~

어느 누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몇 년 전이었다. 교인의 장례식에 갔다가 장지 근처에 있는 친구의 집에 모처럼 들리게 되었다. 목사 겸 교수의 아내로서 세칭 사모님 소리를 듣는 친구의 집은 쾌적하고 아름다웠다. 방금 읽은 듯 식탁에 펼쳐져 있던 프로이드의 책, 그녀가 부드러운 빵에 발라주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의 맛, 그리고 햇살이 내리쬐는 실내를 떠도는 잔잔한 클래식의 선율, 널찍한 베란다에서 풍겨오는 꽃들의 향기와 부드럽고 따뜻한 평화.

발음도 까다로운 남미 어디의 원두커피를 갈아 마시면서 나는 그녀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물었다. 그녀는 두툼한 방석이 놓인 작은 코너를 가리켰다. 저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시간이 정말 좋아.

 

그 날 친구의 집을 다녀온 이후로 꽤 오랜 시간 헷갈렸다.

당시의 나는 일주일에 적어도 네 번을 교회나 교회에 관련된 일로 외출하고 있었다. 수요일 인도자 공부, 금요일 속회 예배, 토요일 성가연습, 그리고 주일. 그 중간 중간 부흥회나 경조사나 계삭회나 개척교회 방문이나 기도회나 하다못해 속도원의 며느리가 둘째 아이를 낳은 산부인과 심방(절대 빈손으로 갈 수 없다!)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는 일이 신앙적 차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숨 가쁘게 뛰어다니며 부르는 찬송가가 있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성경구절도 외웠다. 왜 있지 않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 친구도 그리스도인이고 나도 그리스도인인데 사는 모양은 많이 달랐다. 교회 생활을 너무 누리다 보니 그 밖의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아픔을 겪는 나에 반하여, 그 친구는 전혀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물론 아픔을 겪을 일 없이 아주 잘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의 성품을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다양하게 삶을 사는 것도 인정하시리라고 짐작한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그 친구가 사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교회일로 뺑뺑이 돌지 않고(교회에서 나오라고 하는 날을 얼추 순종하며 나갔더니 일 년 365일 중에 250여일을 나간 적도 있었다) 그 친구처럼 주일에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그 친구처럼 많은 시간을 편히 거실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원두커피를 갈아 마시면서 그리고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를 바른 빵을 먹으면서 교양서적을 교양 있게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는 도톰한 기도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경건한 큐티를 갖는다...

 

작년 가을부터 동사무소에 있는 문화의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가 도서위원으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아닌 공공장소에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침 10시에서 오후 5시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책을 빌려주거나 파본을 정리하고 신간 도서를 신청하거나 회원증을 만들어주면서 하루를 보냈다. 중간에 짬이 나면 그 많은 책들 사이를 거닐면서 책과 함께 할 때 나는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몇 번 교회의 일과 시간이 겹쳐 충돌이 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먼저 그의 나라와...에 위배되는 행동이 아니가, 하면서 스스로를 죄인 시 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아팠다.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또는 위에 계신 분들이, 자꾸 교회에 나오라고 다그치지 않고 <더욱 가정에 충실하세요, 이웃과 교제하는 시간도 있어야 하니까 너무 자주 교회에 오시지 마세요, 집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성도의 교제도 나눌 수 있답니다, 친지들을 돌보아 주세요, 전도는 가까운 곳에 정성을 기울여야 하니까요> 라고 말해주기를 바란다면 나는 바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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