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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하루

불로소득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3. 10. 12.

어제 새벽 산책길을 나섰다가 뜻밖의 불로소득을 했다.

6시 즈음, 아직은 어둑어둑한 길을 막 걷기 시작하는데 후둑, 하면서 무엇인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노르스름하고 탱탱한 은행이었다. 그러고보니 가로수 나무 아래는 온통 은행알 천지다.

문득 며칠 전 어느 할머니가 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은행알 몇 개를 나무 꼬치에 꿰고 계셨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은행이 마구 떨어지는 때인가? 떨어진 것을 주워도 되는가? 주우면 어떻게 먹지? 저것을 벗기면 뭐가 나오나?

...그런 무식하고도 한심한 의문을 가득 품고 은행나무 아래서 한참 서 있었다.

일단, 줍고 보자.

하긴, 너무 탐스럽게, 많이도 떨어져 있었고, 심심치않게 투둑, 하면서 계속 은행알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참 살다보니 길에서 은행도 줍고...

내 자신이 너무 웃겨서 여전히 귓전을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Mp3속의 목사님 말씀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앉은 걸음으로 나무 주변을 꼼꼼히 돌았다. 어느 덧 양 주머니(말간 콧물이 나올 때를 대비한 휴지 두 장이 들어있는 오른쪽 주머니와 산책 할 때 비상시를 대비한 만원짜리 한장-늘 이천 원 정도 지니고 가는데 어제는 잔돈이 없어서 만원 짜리를 챙겼다-은 왼쪽 주머니까징) 다 채웠는데 나무 밑 은행은 아직도 짱짱하게 널려있다. 그 주머니 속에 냄새 고약하고 뭉클한 은행알이 듬뿍 들어간 것이다.

 

그냥 산책을 가려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집으로 다시 들어가서 주머니 속의 은행알을 쟁반에 널려놓고, 이번에는 큰 비닐 봉지를 들고, 아예 가벼운 쌕까지 짊어졌다. 본격적으로 은행을 다 줍고 산책까지 다녀올 생각이었다.

이제 밖은 제법 밝아졌고 차들도 많아졌고 행인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지만 개의치 않고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은행을 주웠다. 와, 꽤 많았다.

쌕에 넣으니 등이 묵직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주워담으면 너무 많아 어떡하지, 즐거운 고민을 하며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

금화처럼 은행이 수북하니 떨어졌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몇 알 떨어져 있지 않다. 이건  또 웬일? 혹시 부지런한 동네 할머니 손을 탄건가?

어쨌던 서툰 은행털이범은 신이 나서 집으로 왔고, 큼큼한 냄새가 나는 옷을 벗어던지면서 가만히 생각하니...

왼쪽 주머니에 있던 비상금 만원이 보이질 않는다.

이렇게 저렇게 잘 찾아봐도 역시 없다. 첫번째 은행털이 때 분명 주머니에 은행을 넣으면서 축축해진 배춧잎을 보았는데...이상하다...

곰곰...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

은행에 눈이 어두워 이 주머니에 넣고 저 주머니에 넣으면서 아마도 쓸려 나와서 길거리에 흘린 모양이렷다?

묵직한 은행 보따리를 보았다. 저것이...만원 어치란 말이군...^^;;

 

그렇게 일, 이분쯤 지났을까, 약간 어두웠던 마음이 화사해졌다.

누군가, 새벽길에 떨어진 만원 짜리 한 장을 주으면서 얼마나 기분 좋았을까, 특히 나처럼 빈한한 인간이 주웠다면.

부디 그러기를, 아마도 그랬으리라. 새벽 길을 걷는 주머니 속이 헐렁한, 허전한 -우리 동네처럼 확실한 서민 동네도 없으니 더더욱 확실한- 사람에게 나는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했구나. 새벽 길거리에서 만원의 불로소득을 즐거워할 사람을 떠올리니 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 아침에 불로소득을 한 두 사람이 행복하군.

ㅋㅋ

 

그렇게 어제 아침을 마무리하고 오늘은 아예 커다란 비닐 봉지까지 준비해서 5시 50분에 은행털이를 하러 나갔는데 어머나?

나무 아래가 깨~끗했다. 한참 헤맨 끝에 겨우 서너 알 주었다.

초범이라 몰랐는데 아마, 어제는 밤새 비가 와서 은행이 집중적으로 떨어진 것 같다. 아닌가? 잘모르니 아니면 말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 길 끝까지 걸었는데 누군가 빗자루로 쓸어버린 것처럼 나무 아래가 깨끗했다.

그리하여 기다린다.

며칠 후에 비소식이 있으니 어둑한 새벽, 단단히 무장하고 본격적인 은행털이를 나설 결심이다.

끝없이 늘어선 은행나무 가로수 길은 내가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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