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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무술생의 아름다운 무술년

슬픈 설교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8. 2. 7.

(노트북에 개똥같이 흩어져 있는 문서파일들을 정리하는 중이다.

마치 개똥같았던 나의 인생을 정리하는 기분으로.

몇 년 전 썼던 글, 잃어버렸던 파일, <슬픈 설교>를 다시 찾았다. 이상한 구석에 낑겨 있었다. 에휴.

그래도 찾았으니 그게 어디람. 기뻐서 얼른 올린다)

 

18슬픈 설교

 

설교말씀 듣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인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몇 설교자의 설교를 들었다.

하루의 시작을 설교로 시작하고 마지막을 문자로 씌어진 설교문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대단한 취미생활이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정말 많은 점이 다르다. 그 다양성을 존중한다. 설교는 당연히 다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인터넷이 발달하고 기독교 관련 서적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지금의 환경은 설교자에게 있어서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나 모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 같다.

 

거의 평생을 한 교회에서 두 세 분의 설교(나의 경우 한 교회에 사십 몇 년을 다녔는데 담임목사는 겨우 세 번 바뀌었다)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절에 비하여, 요즘은 내노라 하는 인기 설교자들의 설교를 기독교 방송이나 인터넷의 교회 홈피를 클릭하면 안방에서 은혜 받을 수 있다.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 넘치는 은혜의 도가니를 잘 활용하면 비교적 편협되지 않은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나 역시 한국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의 설교를 몇 군데 즐겨찾기로 듣고 있다. 설교를 들으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모두 자신의 믿음의 역량대로, 그리고 아는 만큼, 신앙의 깊이만큼 설교하므로 참으로 다양한 접근방식이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소위, 성향이라는 것도 작용하게 마련이어서 자신에게 가장 어필되고 감동받는 설교자를 찾게 마련이다.

한국에 있는 그 많은 목회자 중에서 주목받고 있는 목회자의 설교이니 나름대로 특색도 있고, 주장도 강하다. 목회자들은 좀 껄끄러운 부분이겠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분들의 성적표를 모두 매기고 있다. 그 드높은 교육열에 의하여 고학력이 대부분인 교인들은, 세칭 귀만 커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목사님 말씀이 바로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순진하게 순종하던 지난 시대의 교인들은 이미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는 경계선상에 있는 것 같다.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무조건 아멘하는 믿음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원로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신학적인 정보와 타 교회 목회자와의 비교,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신앙 등급(?)에 따라 조목조목 목회자의 설교를 따지고 드는 교인도 하나 둘 늘어나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알지만 은혜로 넘어가고 싶어하는 분들도 적지 않고, 치열한 신학 논쟁을 쓸데없는, 그리고 잘못된 신앙의 형태라고 비난하는 분들도 계시다. 참 다양하신 분들이 구성원으로 있는 교회니 목회자들 힘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개독교로 비난받고 있고, 비난받아 마땅한 비리가 충만한 교회에서 자정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소수의 비판의 목소리를 죄악시하면서 무시하거나 왕따시키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며칠 째, 우리 교회 목사님이 인도하신 <신년축복 성회>를 다시 듣기로 듣고 있는데, 들을 수록 가슴이 아팠다. , 슬픈 설교였다.

목사님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였다. 요지는 이렇다. 교회에 수십 년 다녀도, 장로, 권사이어도 진정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목사님의 어투로 보아 거의 전부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정말 목사님의 말씀대로(호통대로) 교회에 다니면서도 가짜 믿음, 헛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그토록 많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는 않으셨는지?

어떻게 설교하셨길래 수십년 동안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야말로 제멋대로, 완전 엉터리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지 그런 생각은 하시는지 궁금하다. 무려 5년 동안 아주 잘 가르쳤는데 배우는 교인들의 아다마(죄송)가 영 아니어서 그토록 못 알아듣고,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믿음의 반대편으로만 가고 있다는 말인가.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능력이 쪼그라들어서 성령님이 교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단 말인가. 목사님이 그토록 많은 설교를 하셨을 그 때,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았단 말인가.

수십 년 교회 다닌 사람들, 에 대하여 운운하실 때, 좋은 말씀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 아예 한 번도 없었다고 단정해서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참는다.

 

구원 받으면 그 자리에서 확 변하는가? 과연 그런가?

완전 새사람이 되어서 그 후로는 죄도 짓지 않고 맑고 밝고 유쾌하게 살아가는가? 맨날 즐겁고 기뻐서 찬양만 하면서 살게 되는가? 정말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하면서 탄식하였단 말인가. 사도 바울은 멍청이어서 구원받았으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고백했더란 말인가.

오늘도 신년 성회 세 번 째 설교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들으면서 마음이 참 슬펐다. 여전히 목사님은 추운 밤, 교회에 모인 착한 교인들을 향하여 종주먹을 들이대면서(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녀도, 장로면 뭘 합니다, 권사면 뭘 합니까,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거짓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를 어떡합니까, 하면서 절규에 가까운 설교를 하셨다.

 

기적를 바라게 하는 신앙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가장 큰 기적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죽을병에서 낫고, 부도난 회사가 다시 회생하고, 관광버스타고 가는데 하나님 믿는 사람만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 과연 기적인가. 잘 되는 것만 기적인가. 아프고 병들어도 가족은 제멋대로이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평안과 위로를 누리고 그 사랑에 감격해 하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은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할만한 끔찍한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더 기적이 아닌가.

가장 압권은 어느 유명한 목사님 말씀의 인용이었는데, 깊은 병에 걸린 사람에게 조언했다는 말이었다.

감사헌금을 하면서 그 내용을 이렇게 적으라는 것. <낫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쓰지 말고, <낫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쓰라고 했다는 말씀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것이 과연 믿음인가? 그 사람이 믿은 것은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능력인가. 매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깊은 병의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지, 하나님을 무당 대하듯 매달려 무조건 낫게 해주실 것을 믿고 미리 감사드리오니 내 감사헌금의 용도를 꼭 기억하여 주셔야 할 겁니다! 하고 협박하는 것이 믿음인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리(주권)를 완전 침해하는 모욕적인 행동이 아닌가. 적어도 성경 말씀처럼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구해야 하지 않는가?

혹시 그 환자는 절에 가서도 똑같이 하라고 하면 하는 그런 믿음은 아닐까.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그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병을 통하여 무슨 일을 이루실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헌금하면서 낫게 해달라고, 다 난 것을 믿는다고 쌩떼를 쓰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가? 쌩떼를 쓴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면 그분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맞는가? 쌩떼에 맛을 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쌩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바라시는 것인가?

, 그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내 잔을 거두어 가십시오'라고 말했다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의 자리까지 가지 못하는가.

 

지금 내가 약간의 분노를 가지고 이 글을 쓰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무엇이 좋고, 어떻고를 떠나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여야 할 것이 우선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나님을 마음속에 품으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늘나라, 라고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결국에는 삶과 죽음까지도 초월할 수 있는, 영생을 기뻐하는 성숙된 믿음을 말해야 하지 않은가.

내 옆에 과연 하나님이 계실까, 내 팔목을 잡고 계시기는 한 것인가, 하고 회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꽉 잡아 구원해 주셨고, 당신이 하나님 손을 놓아도 하나님은 절대 당신의 손을 놓지 않는다고 위로해 주면 어디가 덧나는가.

나의, 이 괴롭고도 감당하기 힘든 죄가 가득한 마음에도 하나님이 계셔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도' 성령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다는 그 위로의 말씀은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정말 그 설교를 듣는데 내가 뛰어가서 설교 끝에 마이크를 잡고 싶었다. 기가 죽어 교회당을 나서는 분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너무너무 사랑하신대요.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대요. 잠잠히 바라보신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