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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하루

자랑질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 27.

 

 

 

1995년에 구입한 매직쉐프 가스렌지다. 그니까니 20년 된....

저 가스렌지는 말년운이 좀 있는 셈이다.

19년동안 일년에 두 차례 씻김을 당했는데(그것도 추석과 설에 들른 올케의 손길에 의해 몇달 동안 더께 앉은 얼룩을 겨우 제거받았징)

몇 달 전부터 뒤늦게 회개한 주인여자(년이라고 하면 더 어울리겠지만, 그 년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속어는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다^^)의 손길에 의하여 보시다시피 이렇게 새색시처럼 꽃단장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좋은 세월 다 흘려버리고 다 늙어서 무슨 지랄이냐고 가스렌지가 투박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만 하여튼.

 

생활의 잔재미를 느끼게 된 것은 이곳 13평 아파트로 이사온 이후부터인 것 같다. 실평수 11평의 아주 작은 공간으로 짐을 부려놓고 첫날 밤을 보내는데 정말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편하고 게다가 행복하기까지 했다. 신기했다.

아마도 몇 년 동안 빚에 빚, 카드 결제, 카드론, 리볼링 결제 등등 그런 산더미같은 채무에 시달린 나머지 반 넘게 청산한 것이 너무도 기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실상은 다음날부터 여실히 드러났다.

모든 것이 비좁았다. 살림살이의 반 이상을 버리고 왔지만 한칸짜리 씽크대 앞에서는 정말 이제는 요리는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절대 비만이 아닌 몸집인데도 불구하고 몸을 제대로 돌릴 수도 없었다. 대체 어디서 김치를 썰며 도마를 놓으며 시금치를 무쳐야 하는지, 감자를 어디서 썰어야 하는지 관리사무소에 전화로 상담이라도 하고 싶었다. 수저통은 자꾸 떨어지고 컵은 아슬아슬하게 있다가 툭, 떨어지고, 깨지고, 부서졌다. 이게, 뭐얏! 사는 것이!

그렇게 이를 악 무는데 문득 다가온 생각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

 

과연

아멘이었다.

한숨이 나올 무렵, 문득, 들려온 말씀이 다시 나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요즘은 이런 말씀이 줄곧 들려온다.

<과분한 줄 알아라>

아멘입니당....

 

그래서 오늘도 가스렌지 앞에 섰다.

어제 콩비지찌개를 만드느라

오늘 아침 들기름에 잰 김을 굽느라 약간 얼룩이 진 가스렌지를 박박 닦았다.

닦으면서 생각한다.

 

죄와 허물을 이렇게 말끔하게 닦아주셔서

눈보다 희게 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당~

 

이 모든 잡소리는 결국,

20년이나 된 가스렌지가 저렇게 순결(ㅋㅋ)하다는 자랑질이렷다?

날 때부터 얼룩의 더깨가 앉은 내 마음도

주님의 보혈로 저렇게 순결(다시 ㅋㅋ)해지고 있다는 자랑질이렷다?

 

그러면서 웃는다.

하나님께서 지금 처한 이 기가 막힌 상황들을

과분하다고 일축하시니

걍...

과분한 줄 알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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