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른 네이버 블로그를 뒤지다가 일년 전의 글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칸나라는 닉을 사용한다^^
또 다른 나의 블로그에서는 유다도 칸나도 아닌 다른 닉을 쓰지만 그 셋의 닉을 다 합친 것이 바로 나이니까...
어휴, 블로그를 세개나 맹글어 놓고 이곳저곳 글 한 바닥씩 쓰는 이 못말리는 취미라니^^;;)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시인 문종수는 가끔 말하곤 합니다. "사람이 편견과 무지로 무장하면 천군천사도 당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을 거룩한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에게서 학을 떼거나 호되게 덴 경험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한 말입니다.
최근에 이성복 시인의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 (문학동네, 2001)를 읽다가 이것과 비슷한 말이 적힌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철면피한 삶과 막무가내의 믿음이 감쪽같이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희한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설명을 더 들어보니까, 삶이 삶을 반성하지 않으니까, 믿음이 믿음을 반성하지 않으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철면피한 삶이나 막무가내의 믿음은 다같이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지반을 갖지 않는 무한한 자기 증식 체계"라고 말합니다 (124 쪽).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지반을 갖지 않는다"는 말을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삶이나 믿음을 비추어 반성해 볼 어떤 거울을 갖지 않았다거나 아예 반성이라는 감각 장치가 없는 그러한 삶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자기 증식 체계"라는 말은 어쩌면 억제할 수 없이 증대하는 생체 조직, 자신이 기생하는 몸을 죽이고서야 증식을 멈추는 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설교문 중의 서두만 떼어왔다. 이 설교문을 쓰신 민영진 박사님도, 설교문 서두에 언급된 문종수 시인도 모두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들이다. 두 분,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
어제, 성찬식(ㅋㅋ 가벼운 술자리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었다)을 하기 위하여 버스타고, 전철타고, 다시 택시타고 집까지 찾아오신 모 교인과의, 여섯시간이 넘는 길고긴 친목의 시간을 보내면서,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려면, 어제의 아픔이 고스란히 되살아날 것이므로 맛보기로만 보여주어야것다...
일단, 칸나, 교회에서 만나는 수많은 분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미움을 가지고 대하는 분이 없다는 것에 매우 안도하고.
누구든 인간은 좋은 점과 함께 마음에 들지 않는 고쳤으면 싶은 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당연하지 않나? 사람인데!
관점에 따라 호, 불호의 인간도 다를 것이다. 칸나가 무쟈게 좋아하는 노무현을, 칸나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어떤 분은 노무현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것을 옆에서 보았다. 휴...그거야 어쩌겠는가.
동전의 양면처럼, 불꽃같은 사랑과 신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거나, 때에 따라 비윤리적인 소설과 무한 사랑 예수를 같이 모시고 살 때도 적지 않은 칸나처럼, 사람들의 내면이 획일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어제의 길고긴 대화를 끝내고 내린 칸나의 의문섞인 결론.
사람들은 참, 상처받기 쉽구나, 하는 생각. 왜, 나 스스로 나를 지키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
왜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내가 고통당하고 우울해지고,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야 하는가.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든, 우습게 보든, 학식과 권력과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저울질을 하든, 무시하든,
그것이 그토록 커다란 상처가 되는 것일까?
예수님이 나를 무시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은 그런 나를 끔찍하게 사랑하신다고 약속하고 도장찍고 복사까지 해줬는데!
교회에 왔다리갔다리 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죄인이라고 하는 카테고리 안에 있는 그야말로 죄인들이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마음속도 더 시커멓고, 살짝 꼬여있고, 기회만 되면 들이박고 싶어하는 뿔이 몇 개씩 나 있고, 성격이 유별난 사람들이 많다. 많을 수밖에. 죄인들의 소굴이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웬만큼 잘 살고, 경거망동한 행동 잘 하지 않는, 웬만큼 배운 인격자들은 눈에 띄는 죄를 별로 짓지 않기 때문에 화창한 일요일, 죄인들의 소굴로 기어들어 가는 게 아니라 산이나 필드로 가게 마련이다.
게다가. 교회라는 곳은 옛날 삼청교육대처럼 옛버릇을 하나씩 고쳐나가는 순화교육의 장이라는 역할도 있다. 죄인들이 모여서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다듬어지고 고쳐지는, 배움의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다 배운 사람은? 천국에 가겠지. 교육 끝났으니까^^
살아서 교회 열라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계속 고쳐야할 무엇인가 있는 분들이고, 그걸 가지고 기독교 용어로 성화되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 잘난 사람은 당연히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목에 힘줄 인간도 물론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너보다 잘 났거든, 하면서 큰소리칠 인간도 없다는 말이다. 특히, 예수님의 계산법에 의한다면 배운자나 있는자, 권력있는자들은 그 반대되는 사람들보다 훨씬 죄가 깊어서 회개할 거리가 따따블이라고 하셨다.
배 두드리며 잘 사는 니들이 천국에 가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이 낙타 바늘귀 운운하시지 않았을까나...?(이건 칸나 혼자 생각이긴 하다.)
삶이 삶을 반성하지 않으니까 철면피한 삶이 되고, 믿음이 믿음을 반성하지 않으니까 막무가내의 믿음이 되지 않느냐는 민 목사님의 말씀은 칸나를 비롯한 한국 개신교 교인들의 골수를 쪼갠다.
끝없는 자기 반성이 믿음인데, 반성의 끝이 믿음이 되어버린 한국 교인들에게 일갈하신 그 말씀은 기필코 가슴에 새겨야 하리...
아울러, 저 양반은 자기 반성이 없넹, 하면서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내 손가락 끝을 내 가슴으로 향하게 하면 해결 될 일이다.
긍휼과 자비와 노하기를 더디하는 그 마음과, 우리들을(나를)바라볼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예수님의 그 눈으로, 엉터리이기는 매한가지인 서로에게 눈웃음치면서 잘 끌어안고 살면 어디가 덧나는지 참...
물론 칸나 역시 교회에서 나 믿음 좋네,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분들(그런분들은 대개 교회에서 직급이 높으시다) 많이 뵈었지만 그렇다고 별로 시험에 들 일도 없는 것이, 그 모습 자체가 내 믿음 꽝입니당 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니까. 내 믿음이 쫌 막무가내입죠, 하면서 광고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데, 거론할 가치도 없는 분들 때문에 시험들면 나만 손해 아닌가...?
어제 대화 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교회내에서 교인과 교인, 교인과 목회자의 갈등이 그토록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구나, 를 체감할 수 있었다는 것. 이제서야!
그렇게까지 서로에 대해 반목질시하고 모함하고, 딴소리하고, 루머를 퍼뜨리는지는 몰랐다. 그 모든 것은 내 믿음이 네 믿음보다야 낫거든, 하는 교만아닌 교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하긴 알거나 모르거나 나에게는 별 영향은 없지만.
교회내에서의 빈부격차나 사회각 계층간의 갭은 사회에서보다 훨씬 더 깊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안되잖아요!
휴... 밥맛없어 보이는 저 높으신 분도, 아무것도 없어서 무시당한다고 맨날 혈기 부리는 저 낮은 분도 실은 하나님이 똑같이 사랑하는 죄인들인데...한 형제들이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도 깨알같은 글씨로 성경 가득 강조했건만...
우리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순수하고도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다음 주 교회가면, 정말 모든 사람들을 꼭 끌어안아 주고 싶다. 목사님을 비롯하여 막무가내의 믿음으로 무장한 많은 분들까지!
'그러므로 생각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블스터디 참관기^^ (0) | 2012.03.12 |
---|---|
특별하지 않은 특별 (0) | 2012.03.08 |
하나님은 나의 스토커! (0) | 2011.06.25 |
5년 3개월치 설교! (0) | 2011.06.25 |
하나님의 초대, 맑게 소외된 자리 (0) | 2011.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