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을 그치십시오!
무엇인가 투정을 부리려고 하면 즉시 마음에 안 드는 해답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변변찮은 답을 주셨다.
그 알량한 답은 “탄식을 그치십시오!”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에서부터 소소한 것에 일일이 가지 마라, 와라, 끝내라, 이렇게 맨날 반말만 하시더니 오늘은 아주 점잖게 나를 대접하시네?
그런데 그 존대어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주, 진지한, 그러므로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는 압박성 답인 것이다.
매월 5일은 남편에게 생활비를 주는 날이다. 뭐 생활비라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우습지도 않은 40만원이다.
그 돈으로 닭이나 풋고추, 쌀도 사야하고 남편 간식으로 팥이 들어있는 달콤한 아이스 바 비비빅이나 초코파이도 사야하고 서울을 들락거리는 나의 교통비도 챙겨야 하고 가끔은 아들 차에 기름도 넣어주어야 한다.
남편에게 가계부를 쓰게 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꼼꼼한 B형인 성질머리로 아주 성실하게 잘 기록하고 있다.
가끔 내가 사우나 가게 돈 줘, 하면 여름에는 집에서 샤워해도 된다는 둥 하면서 좀처럼 봉투를 열려고 하지 않을 때는 속이 터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말이 났으니까 하는 말인데 엊그제 지름신이 동하여 9900원짜리 민소매 원피스를 하나 건져 왔을 때도 남편의 잔소리가 장난 아니었다.
행거에 걸려있는 옷도 많던데 하면서 바가지를 긁는데 열 받아 죽을 뻔했다. 어쨌든. 4월까지는 정말 하늘의 만나로 눈물겹게 살았고 5월부터는 초절약 시스템 가동 중이다.
40만원의 세상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별 수입이 없는 나에게는 400만원처럼 느껴지는 끔찍한 액수다. 거기에 남편의 한 달 용돈 5만원을 더 보태야 했다. 신사임당 딱 한 장으로 남편은 담배도 사고 헌금도 준비하고 신문대금도 내고, 가끔 나를 위해 시큼 상큼한 자두도 몇 알 사오곤 하는 것이다.
엊그제 결혼기념일에는 집 앞 파스타 집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까르보나라와 봉졸레 파스타를 쏘는데 17000원이라는 거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오늘 아침, 생활비를 넣은 돈 봉투를 열어보던 남편이 지폐 몇 장이 남아있다고 좋아하면서 말했다.
-내일 생활비 주는 날이네?
은행 잔고 부족으로 헤매는 사정을 알 리 없는 남편은 지극히 천진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쩐지...어제 밤에는 내가 프라이드 치킨 타령을 했더니 호기롭게 시켜먹으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아마 매일 봉투를 열어보고 잔액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아주 오랜 옛날, 학교 준비물 등으로 손을 내밀던 나에게 우리 어머니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하루아침에 망해버려서 돈 나올 구멍이 없던 어머니는 한숨소리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날 갖다 팔아라.
정말 생각 같아서는 남편에게도 그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는 부도 직전의 중소기업체 사장처럼 남편에게 말했다.
-내일 날짜니까 내일 주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부도내고 어디 날라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한 달 도망갔다 왔으니 이제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아침부터 남편이 월급 운운하면서부터 슬슬 기분이 다운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짜증 섞인 투정을 부렸다.
-하나님, 월급 주시려면 선불은 안 될까요? 보시다시피 지금 며칠 째 열심히 쓰고 있잖아요.
(그리고 차마 하나님께도 말은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다. 하나님. 쉰 몇 살이나 된 내가 돈 몇 십 만원 때문에 한 달 내내 우울하게 보내게 하고 싶으세요? 그렇게 쩨쩨하게 살게 하시고 싶으세요? 누가 400만원 달래요? 똥그래미 잘 보세요 여섯 개가 아니라 다섯 개잖아요. 하나님은 대체 왜 그렇게 저에게만 쪼잔하세요?)
홧김에 덜컥 냉장고를 힘차게 열고 우유를 꺼내 한 컵 가득 따라서 원 샷을 했다. 그런데, 원 샷을 하면서 생각해보니 맛있는 우유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 아닌가. 두 달 전에는 우유도 제대로 사 먹을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그래도 우유는 먹지 않은가 말이다.
-앗, 감사!
감사드릴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저절로 감사가 나왔다.
400만원 같은 40만원의 과중한 무게와, 상대적인 결핍으로 인한 공복감에 식탁위의 호두를 한 움큼 집어 우적우적 씹는데 또 어느새인지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하나님, 누군가의 협찬품이지만 이렇게 맛있는 호두를 마음껏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자두 먹고, 커피 마시고, 하니까, 댓발은 튀어나왔던 입이 쏙 들어가 버렸다.
하는 수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373장을 펼쳤다. 겨울 내내 울면서 부르던 찬송가였다. 남편이 무엇을 하나 궁금해서 뒤를 슬쩍 돌아보았더니 돋보기안경을 끼고 중얼중얼 사도행전을 읽고 계셨다. 하나님이 보시고 좋아 하시겠네, 하고 칭찬 한 마디 해주었다.
찬송가 373장을 펼쳤다. <고요한 바다로> 고요한 바다로 가고 싶어서, 그래서 골랐다. 지난 겨울 내내 울면서 불렀던 찬송가이기도 했다. 찬송가를 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지난 몇 달 동안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찬송가를 쳤지만 앞으로는 간증으로 부르게 될 것을 믿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하소서.
이 세상 고락 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주소서.
어느새 성경읽기가 끝났는지 피아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잘 마른 수건을 걷어 착착 개고 있던 남편도 따라 불렀다.
1절은 한숨을 쉬면서 불렀지만 2절부터는 서서히 힘이 솟았다.
지금 우리의 형편상 큰 물결이 일어나 쉴 수 없지만,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을 향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풍랑 인하여 더 빨리 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한 시간 동안 좋아하는 찬송가를 골라가면서 쳤다. 곡조 있는 기도는 한 시간 동안 완벽하게 나를 위로했고 그리고 새 힘을 주었다.
그 알량한 월급 때문에 탄식으로 하루를 보낼 뻔 했던 나는 다시 명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이 귓전을 울렸던 것이다.
“탄식을 그치십시오!”
하늘에서 돈 40만원을 떨어뜨리시겠다는 답이 아니고 그냥 호통이나 치시는 하나님의 대답이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정중하게 나에게 말씀하시므로 (어쩔수 없이라도)아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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