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햇살아래 천변을 산책했다. 문우와 함께 길을 걷는데 그녀가 말한다.
"역시 글이라는 것은 절박하고 고통속에서 태어나는 것 같아. 칸나 요즘 글은 기름기가 낀 것 같아."
내가 말했다.
"환승입니다, 바로 그거거든."
우리는 웃었다. "환승입니다" 라는 제목의, 나의 블로그 글을 읽은 사람만 알 수 있는 암호였기에.
2012년 3월의 어느날 다른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환승입니다"
너무너무너무 힘들었던 때의 기록이다.
거하게 저녁 먹고 커피 마시면서 책을 읽다가 문득, 문우가 한 말이 떠올라 지난 블로그를 뒤졌다.
있었다. 고스란히 남아있는 슬픔.
다시 읽는데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때의 막막함, 절망, 아득함, 기약없음, 소망도 없음...이 너무도 또렷하게 떠오르니 지금의 내가 오히려 더 견딜 수 없다...
며칠 전 오랜 친구가 원두커피 두 봉지를 선물했다. 갓 볶아낸 원두알이 잡혀졌다. 요즘은 아침마다 원두를 간다. 그 향기로운 커피 냄새가 나를 거의 기절시키고 있다.
오늘은 느닷없이 쌀이 20킬로 배달되어 왔다. 새신자(세상에 2009년 봄에 내가 양육한 신자를 아직도 그렇게 부른다)가 보내준 쌀이다.
고맙다고 톡을 했더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도 배달될 것이라고 한다.
으악.
얼마전 알로에 화장품 세트가 배달오는 바람에 놀래자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계속 이렇게 난리다.
오후에는 재래시장의 방앗간에 들러 가장 질이 좋은 고추를 골라 4근이나 빻아왔다. 15000원 곱하기 4는 60000원이지만 지난 목요일 오래오래된 친구(초딩부터 칭구)가 재래시장 상품권을 50000원어치나 주어서 내 돈은 만원 들었다. 그래서 지금 남편은 배달시킨 배추를 다듬고 있다. 남편 말에 의한다면 내일 김장을 할 것이라고?
나는 형광펜으로 밑줄 그으면서 이런 책 읽는 중이다. 물론 세음과 함께...^^
왜냐하면, 드디어 회개(^^)하신 남편님이 작은 방에 나의 서재를 깜빡 넘어갈 정도로 멋지게 꾸며주셨기 때문이다! 와, 이제 나는 완전 자유~~~
(이 사진은 어제 창원늘푸른교회 11시 예배 실황 모습이다 ㅋㅋ)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이 책은 12월의 독서회 책이다. 이 책의 공동저자이기도 한, 오래된 지인(실은 내 친구의 남편ㅋㅋ) 한인철 박사가 12월 독서회에 와서 특강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 오랜만이어요. 내가 감사카드 써드릴께용^^)
내가 커다란 책상위에 내 마음껏 만방으로 어질러놓으면서 살고 싶은게 꿈이라고 했더니 식탁까지 보조 책상으로 놓아주셨도다!
그러니 나는 노트북 하다가 책 읽다가 휴대폰을 블루투스로 두들기다가 낙서하다가 시 쓰다가 오늘 할일 메모를 해도 책상위가 널널하다. 이러니 이러니 내가 안행복할 리가 있겠어?
환승입니다 글을 올린다.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환승입니다"
세상에....하나님은 나에게 존댓말도 하시넹?
하나님 이쁘당
그때 그시절의 글....................................................................................................
환승입니다. 2012년 3월 28일
냉장고를 열었다.
깨끗하다. 두어 점 남은 김치, 김... 멸치... 홍당무와 무 반 개, 파, 된장, 그리고 각종 소스...뿐이다.
만들어진 음식도, 만들 수 있는 음식재료도 없다.
이년째 곰삭고 있는 뒤베란다의 묵은지를 이제는 먹을 때가 되었는가보다.
냉동실을 열었다.
돌보다 더 딱딱하게 언 절편만 가득하다. 저, 떡덩이는 모두 죽음의 냄새가 난다. 작년 가을 외숙모의 장례식에서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남은 떡을, 부자 이모가 챙겨주었다. 마치 이바지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귀하게 싸주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가져와 그대로 얼려버렸다. 그리고 올 초였던가? 이모의 장례식에서 또 부자 이모는 떡덩어리를 싸주었다. 이미 냉동실에 가득한 떡이 떠올랐지만, 아무도 가져갈 사람이 없다는 말에 그냥 받아들었다. 냉동칸을 꽉 채울 정도로 가득한 떡을 보면서 생각한다. 서로 엉겨 얼어붙은 저 덩어리를 바닥에 힘껏 내리치고, 그래서 조각이 나면 그 한 조각을 찜통에 넣고 쪄서 따끈하고 말랑말랑하게 되면 하얀 설탕을 듬뿍 뿌려 남편에게 주어야겠다... 그 전에 저 죽음의 냄새가 자옥한 떡덩어리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받아온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 버리는 떡을 쥐어주는 이모를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더욱 더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명도 모세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
<싶다>는 싶다로 끝날 것이기 때문에 오늘 밤 회개의 기도는 좀 짧겠지?
그리고 그곳에 새로운 무엇인가가 채워지기 전까지는 다시는 냉동실을 열지 말아야겠다.
건너편 아파트에 장이 섰길래 남편에게 만원짜리 한 장을 주어 보냈다. 계란 한 판, 그리고 시금치, 담배 한 갑, 나머지는 팁.
계산을 하던 남편이 갸웃거렸다. 과연 남을까?
남아!
내가 말했다. 계란 한 판 5500원, 시금치 세일해서 1000원, 담배 2700원....
남긴 남는구나.
남편이 돌아왔다.
빨간 줄로 묶은 계란 한 판과 일리터 들이 서울 우유 한 팩과 담배를 사가지고 왔다.
일주일 넘게 우유 타령을 하던 나를 위해 남편이 시금치를 포기한 것이다.
시금치 된장국은 먹을 수 없게 되었지만 간만에 우유를 보니 너무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아들처럼 우유우유우유 하면서 우유를 받아들었다. 기뻤다.
아들이 아주 어릴 때, 잠에서 깨어나면 두 손을 벌리고 잼잼을 하면서 우유우유우유했다. 내가 급하게 컵에 우유를 따르고 잰걸음으로 아들에게 다가갈 때까지 계속 되던, 노래소리같았던 말, 우유우유우유....
며칠 전 하나님께 아우성을 친 적이 있었다.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우유는 먹게 해주셔야지욧!...하다가 아차 싶어서 얼릉 입을 다물고
담배를 끊으면 될 거 아니냐는 대답이 나오기 전에 하나남께 취소사인을 보냈다.
담배 한 갑의 가격과 우유 한 통의 가격은 비슷하다. 그래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 효율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담배가 윗길이지 싶다. 스무 번의 쾌락과 겨우 두 세번의 충족을 어떻게 바꾸나!
만원짜리 홈플러스 상품권 두 장이 한 달 째 내 가방속에 있는데 아직 사용하지 못했다.
살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점심 때 아들이 집에 들렀다.
뭐, 먹을 거 없나?
글쎄올시다...
아들은 냉장고에 가득차 있는 계란을 보더니 비빔밥으로 메뉴를 정했다.
대체 무엇을 넣을 건데?
김과 계란과 고추장.
그러다 진열장 안에 있던 마지막 참치캔을 발견한 아들이 로또 당첨된 것 처럼 좋아한다.
계란 두개 프라이하는 동안, 김은 아들이 가위로 썰었고, 참치 반 캔을 밥위에 얹었고, 고추장은 내가 스픈으로 떠 넣어 주었다. 그위에 참기름 두 방울 떨어뜨려주었더니 아들은 엄지 손가락을 힘껏 치켜들었다. 판타스틱!
재료는 빈약했는지 모르지만 먹은 폼새는 오성급 호텔의 만찬을 먹는 딱 그 모습이다.
...가난을 즐기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니 진력난다.
이제는 좀 다른 쪽으로 갈아타고 싶다. 누가 나에게 예쁜 목소리로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환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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