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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터키 성지순례

27. 드디어 고린도!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2. 16.

유명한 테베를 지나고 고린도 시가지로 들어서고 이윽고 고린도 운하를 지났다. 운하는 깊고 좁고 길었다. 그리고는 해변에 자리 잡은 칼라마키 비치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전형적인 휴양 호텔이었다. 신비스러울 정도로 짙푸른 에게 해에 석양이 지고 있었다. 호텔의 정원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제법 너른 풀장까지 구비되어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해변이었다. 바닷물이 부드럽게 해변을 감싸며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지하 1층의 식당 통 유리창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바닷가에서 식사를 하는 것처럼 호사스러웠다. 식사 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밖으로 나가 어둠이 깃든 정원을 거닐었다. 유럽풍의 호텔은 단정했다. 호화롭지 않으나 호화로운 맛이 나는 기묘한 느낌의 호텔이었다.

정원에서 바닷바람을 흠뻑 맞고 잠시 쉬어 갈 양으로 로비 의자에 앉았다. 커피 냄새가 그윽한 로비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로비 구석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흑자줏색 벨벳 덮개를 제쳤더니, 세상에, 200년은 족히 넘었을 엔틱 피아노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건반은 들쑥날쑥했지만 의외로 조율 상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건반위로 손이 올라갔고, 나도 모르게 찬양곡을 치기 시작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감사드리세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나의 맘과 뜻 다해 주를 사랑 합니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내가 약할 때 강함 주고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나의 주

감사 감사

 

피아노 소리를 들은 순례자들이 하나 둘 피아노 곁으로 모여 들더니 모두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호텔 로비에서 찬양이 시작되었다. 순례자 중에 있던 성가대 반주자 권사님이 다시 피아노 앞에 앉고 누군가 찬양집을 돌렸다. 조용한 로비에 찬양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산책을 나왔던 외국인 부부가 박수를 쳤다. 원더풀! 천주교에서 단체 성지순례를 온 또 다른 여행팀들도 로비 의자에 앉아 우리의 합창을 들으며 흥겨워했다. 노래로, 모두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다. 프런트의 직원들도, 지나던 외국인도, 찬송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누군가 값비싼 주스를 노래하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돌렸다. 목을 축이면서 우리는 한 시간 이상 찬양을 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각자의 삶 속에서 지금 이 시각까지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찬양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천국을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에서의 삶은 이런 것일까. 평화.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를 누리는 곳, 천국. 나는 고요한 목소리로 찬양하는 순례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 어리는 감동의 눈물을 나는 보았다. 그것은, 천국의 시간을 누리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을 것이다.

 

늦은 밤 발코니로 나갔다.

조명등이 호텔의 정원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 꿈속처럼 신비한데, 순간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원에 있는 풀장 전체가 옥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풀장 속에 어떤 조명 장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어둠 속에서 사각형의 풀장만 오롯이 빛나고 있는 것이 마치 깊은 바다 속을 보는 듯 했다. 세상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사치스러운 색이 그곳에는 존재했다.

멋스러운 등나무 의자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눈동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옥빛 풀장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풀장을 제외한 곳은 어둠에 잠겨 있다. 그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는 어떤 황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 명확한 경계가 부러웠다.

나는 종종 선과 악이, 평화와 전쟁이, 슬픔과 희열이, 눈물과 환희가 구분되지 않는 경험을 했다. 행복과 불행도, 고통과 쾌락도, 눈물과 미소도 종종 구분되지 않았다. 나에게 그것들은 섞여 있었고, 뚜렷한 경계가 없이 번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좋았다.

세상의 어느 것들을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잘라버릴 수 있나? 이쪽과 저쪽을 어떻게 명확하게 건너갈 수 있나? 고통에 차 있으면서도 온몸을 적시는 희열을 나는 알고 있었고, 또한 그 희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차가운 고통의 감촉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느끼고야 말았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오르는 기쁨의 열락을 살갗으로 느꼈고, 기쁨의 열락 뒤에 잇닿아 있는 불행의 옷자락을 나는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은 저 풀장의 오묘한 빛의 제국과 어둠의 세상을 분별하는 삶을 살고 싶다.

다시 라이터를 당겼다. 나의 어두운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나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